March to school

March to school

여행이란것. 우리에게 있어선 그림자 처럼 붙어다니는 단어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부모님 집 부터 신혼집까지 여러가지 여행을 한다. 이런 여행이 늘 신비로운것은 아니다. 어쩔땐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적응시킬수 밖에 없는 그런 곳에 도달한 나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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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해, 2000년 3월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시작됐다.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온 나는 포항이라는 새로운 도시 아이들과 접했어야 했었다. 콘크리트 벽 사이로 700명의 교복차림 친구들이 새들처럼 긴장된 눈으로 교실동안을 살피고 있는 도중 나와 같이 시골에서 온 아이들은 몇몇 군데군데 조용히 앉아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이 낯선 교실에서 뒷걸음질 쳐 나오고 싶었지만 ‘학교 부적응’ 이라는 실망을 가족들에게 줄수 없었고, 새로운 도시에서 다시 살던 곳으로 ‘(적응에 실패한)재입학’이라는 명찰은 달수가 없었다. 17살 단체 생활. 기숙사방 하나 당 6 명에서 8명 사이에 잠들어야 했던 나는 그제껏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없고, 심지어 캠핑 가는것 마저 기피하던 아이었다. 3년 동안 나를 비롯한 내 동기들은 작은 붉은 벽돌건물 안, 단 일분마저 혼자 있을 시간이 없는 그런 공간 속, 선후배들 사이 눈빛조차 마주쳐서는 안되는 싸늘한 기운이 오가는 그 곳 기숙사에서 어느새 청소년기를 마감하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우리는 모두 각자 자기가 살던 작은 동네 학교로 부터 벗어나 (자의로 타의로든) 조금더 큰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자 모인 큰 꿈을 가진 친구들이였다.

2013-02-16 11.31.00

어느날 아침, 1학년 반장선거 날 나는 35명 가량 되는 친구들 앞에서 뜬금없이 노래하는 나를 발견한다. 왜 그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머릿속은 그렇게 하겠다는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내 몸에, 내 목구멍에, 내 허파에 명령을 내려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있었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면서 머릿속 어느 한켠에서는 열심히올라오는 부끄러움을 나는 짓누르고 있었다. ‘나…왜 그랬을까?’ 반장이 되는경우 이런이런걸 가능하게 하겠다 하는 발표를 하는 순서였는데 왜 나는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노래를 부른것일까? 그것도 반에 34명은 모두 자기네들끼리는 앞면이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말이다. 다시말해 내 친구, 내 이름을 알고, 나와 같은 학원을 다닌적이 있는 친구는 다 90 분이나 차로 떨어진 곳에 있었고, 이 곳은 내가 처음으로 나를 홍보해야 하는 새로운 곳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는 광대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날 나는 처참히 반장선거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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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그날을 후회하지 않았나보다. 열심히 일학년을 마치고 학교 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해 나가고 있을때 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발견했다. 바로 나의 담임 선생님. 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학습의 목표는 내 작은 동네 중학교에서는 친구들과의 경쟁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호기심을 유발하는것에 대한 내 나름데로의 발견과 리서치, 라디오 청취 또는 독서 였다. 그것이 다였고, 그것이상을 선생님들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공부를 하게 발을 들이게된 이 다른지방의 고등학교에서는 나의 성적을 채찍질 하는건 누군가와의 비교, 점수 공개, 차별 학습, 우선 학습, 우등반 학습 이었다. 호기심과 리서치가 긍정적인 채찍이었다면 점수바탕 우등반 가리기는 피비린내나는 상처뿐인 채찍질이었다. 대부분 교사들은 그렇게 우리들을 모의고사와 성적에 따는 우등반 갈림이라는 충격요법으로 우리들을 경쟁에 두게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상상의 나래를 넘나드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내친구 예빈이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치고 나에게 말했다. “난 커서 영화 감독이 되고 싶어.” 나는 영화 감독은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며 철학을 논하고 음악가의 혼을 이해하려는 예빈이의 꿈을 교실에 들어오는 햇살맞은 먼지를 털듯 내 귀에 앉은 그 말을 ‘훅’ 하고 털어 버렸다. 지금 나는 예빈이와 연락이 닿진 않지만 13년이 지난후 이제야 예빈이의 아름다운 꿈을 이해했고, 그때 친구를 지지하지 못해줘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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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빈이와는 1학년 반장선거를 할때 같은 반 친구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런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다행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1학년, 2학년, 3학년을 거처 가면서 내가 반긴 선생님들은, 내가 좋아했던 과목 선생님들은 모두 책과는 거리가 먼, 책을 보지 않고도 수업이 가능한, 그 과목에 자신의 열정이 넘친 선생님들이었다. 그까짓 문제집이 뭘 더 채워줄까? 수십권을 사서 많이 풀면 많이 풀 수록 본분을 다하는 듯한 그러한 학습을 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고등학생때와 다를것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만 속속이 빼놓고 학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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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힘든 타지생활을 마음으로 이해해준 나의 1학년 담임 선생님이자 생물 선생님. 선생님은 직접 피피티로 작업한 수업을 그당시 진행하셨고, 뭔가 모르지만 낚시를 너무 좋아하셔서 매일 낚시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신게 기억난다. 나는 낚시를 해본적도 없거니와 관심이 없었지만 선생님이 취미가 있다는게 좋았다. 외냐면 다른 선생님들은 점수로 왈가왈부 하거나, 강한 정치적 취향을 내세우거나, 학생들이나 남의 흉을 취미삼아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담임 선생님은 결국 시험점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걸 알고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두번째로 내가 좋아한 선생님은 윤리 선생님이시다. 학교에서 약간 똘끼가 있다고 소문이 나신 그 분은 정말 외계에서 오신분 처럼 수업을 특이하게 하셨다. 나는 알았다. 그분이 정말 윤리과목을 사랑하고, 그 과목에 박식한 분이신걸. 친구들은 수능에 중요한 과목에 아니기 때문에 그 과목과 선생님을 동시에 비과목에 넣고 심지어는 무시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이후로 그 선생님을 모 대학원에 다니신다는 소문을 들었고 어느 날엔 그 분이 그 대학원에 지나가는걸 보기도 했다. 인사는 못드렸지만 내가 본받고 싶어하는 선생님에게 지금 같아선 먼저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

CN Tower

얼마 전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주인공이 새로 이사간 곳에서 다니게 된 학교를 이야기하면서 내 타지 고등학교 생활이 문득 떠올랐다. 17살 나에게도 버거웠던 그 삶.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연약했던 그때, 누군가 버팀목이 되어줄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채찍으로만 달려야 했던 그때, 해가지고 집으로 가면 엄마나 아빠를 보며 투덜투덜 할 수있는 친구들의 뒷걸음을 부러워 했던 그때, 이런 것들을 지금 나눌 수 있는건 아마 그때 타지 생활을 하던 친구들이 서로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너무 아팠는데 표시하나 안내고 잘 지낸거 같다고 서로에게 칭찬도 해주고,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그때 일을 생각한다.

우리는 그때 우리에게 내던져진 교실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All photos by Sejin